여행을 좋아하기에 갈색 이정표가 보이는 곳은 대부분 방문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병천을 지날때면 ‘김시민 장군 유허지’라는 갈색 이정표를 만나게 되는데, 유허지란 단어가 생소하여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과 더불어 또 한명의 충무공 시호를 갖고 계신 김시민 장군께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던 생가지로 전하고 있습니다. 1554년 목천(현 천안시 병천면)출생으로 8세 때 가축들에게 해를 입혔던 큰 뱀을 활로 쏴 죽였다고 합니다.
1578년 무과에 급제해 군기시에서 근무를 시작하였고, 파직되었다가 1583년 니탕개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훈련원 판관으로 복직했지만 병조판서에게 군대 강화에 대한 건의를 올렸다가 평화로운 시기에 군대를 강화할 필요는 없다면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크게 분노하며 사직했습니다.
이때의 일을 국조인물고에서는 좀 더 자세히 풀이하고 있는데,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격분한 김시민 장군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던지고 발로 밟아 부수면서 “장부가 이것이 아니라면 어찌 남에게 모욕 받을 수 있는가!”라며 소리치고는 바로 벼슬을 던지고 물러갔다고 합니다. 전해지는 일화만 살펴봐도 자존심 강하고 기개가 남다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후 1591년, 진주판관에 제수되게 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 초기 죽은 진주목사 이경을 대신하여 진주성을 수축하고 무기를 강화하여 성을 지켰습니다. 10월, 전라도 진공에 실패한 일본군은 진주를 통해 전라도로 진공할 목적으로 나가오카와 하세가와가 이끄는 3만의 대군을 진주성으로 보내 성을 공략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진주 대첩!
‘진주성대첩’은 3,800여 명의 군사로 3만여 명의 왜병을 맞아 2만여 명을 사살하는 큰 전공을 세운 전투입니다.
3군으로 나눈 일본군이 성을 둘러싸고 포위 공격을 감행하자 김시민 장군은 고을 안에 사는 백성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부 성으로 들어오게 하고 특히 여자는 모두 남장을 하라고 명령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조직된 3,8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성을 철통같이 지키며 7일간의 대혈전 끝에 일본군을 물리쳐 퇴각시켰습니다.
진주성 사수에 힘을 쓴 건 비단 김시민 장군과 진주성에 있던 군사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곽재우, 최경회 등의 의병들이 일본군의 배후를 습격해 진주성 사수에 많은 힘을 보탰습니다. 이렇듯 진주성 대첩은 관·군·민이 하나로 뭉쳐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위기를 극복한 위대한 전투인 것입니다. 하지만 전투 마지막 날 적의 탄환을 맞고 의식을 잃어 전투가 끝난 후 한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얼마 후 안타깝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생가지 위쪽으로 김시민 장군 일가의 묘가 있습니다. 계단옆에 꽃들이 봄소식을 전해주는 듯 합니다.
유적비는 1988년에 김시민장군 기념사업회에서 걸립하였는데, 높이가 약2m이고, 자연석비 전면에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장군(將軍)사사처(射蛇處)』의 비명이 각자되어 있습니다.
『구암집』 등의 사료에 의하면 목천면 백촌리(현 병천면 가전리)에서 출생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장군이 9세 때에 동네 앞 백진천의 이무기를 잡기 위해 활로 쏘았다는 사사처가 보존·관리되고 있습니다.
진주시에서는 남강에 새로 사장교를 지어 “김시민대교”라는 이름으로 탄생시키고, 혁신도시 지역의 동 이름을 “충무공동”이라 명명한 생각이 나면서 천안의 위인들을 담아 이곳저곳에 좀 더 많이 알려겠다는 사명감이 생겼습니다.
유적비 바로 옆에 보호수가 있길래 찍어 봤습니다. 오랜 시간 한 곳에 있으며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을지 생각해 봤습니다.
꽃 한송이도 엄청난 역사를 담고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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