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 | 나이 | 행적 | 대내외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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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 |
1 | 9월 2일 새벽.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당시 주소 : 충청도 목천군 읍내면 동리)에서 경북 의성·영해군수를 지내고 교육자인 延安李氏 이병옥(1849.4.5.)의 장남으로 태어남. 이때 그의 아버지는 21세. 어머니 廣州安氏(1847.5.19.)는 23세. 본관은 延安. 조선조 숙종 때 임실현감(任實縣監)과 이판(吏判)을 역임한 이만성(李萬成)의 후손이며 영조 때 예판(禮判)인 이지억(李之億)의 6代孫임. 字는 鳳所, 號는 石吾 또는 石梧, 岩山, 石五이며, 異名은 李亮, 15代孫임. |
高宗 6년 |
1873 | 5 | 향리의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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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 | 7 | 천자문. 書道를 습득, 매우 총명하여 고을에서 칭송됨. |
9월, 日船 雲揚號의 포격사건 |
1876 | 8 | 중국 고전 사서삼경 등을 읽음. 이로부터 몇 년 후 七書에 통달하여 신동으로 불렸다 함. |
2월 27일, 강화도조약 체결. 한민족에 대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기 시작함. |
1878 | 10 | 충북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 조부 이석구(李錫九) 집에 移居. 소년시절을 이곳에서 한문 등 공부로 인격수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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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 | 14 | 강화도조약의 참뜻을 물어 선구자로서의 숨은 기질을 나타냄. |
임오군란 일어남. |
1884 | 16 | 아버지 따라 한성을 다녀옴.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에 접함. |
12월 4일. 감신정변. 개화파와 수구파와의 대립 |
1885 | 17 | 일가가 상경 이주, 한성부 종로 봉익동 2-4번지. 이때부터 字를 봉소(鳳所)라 부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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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 | 18 | 아버지를 따라 경북 영해읍으로 감. 삼천리 강산 민정유람 시작됨. 전국토에서 일제침략 과정을 목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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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 | 20 | 아버지의 관직 따라 평양으로 가 함께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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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 | 24 | 국가시험인 응제진자(應製進士)에 합격, 사회진출의 대망을 품음. 아호를 석오(石吾)라 자호(自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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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 | 25 | 아버지 따라 원산으로 가 육영사업(광성학교 후에 광명학교로 개칭)에 조력함. |
고종 31년 2월 동학혁명이 일어남. 김옥균, 상해동화양행에서 피살 |
1894 | 26 | 풍산김씨(豊山金氏) 김경선(金慶善) 여사와 혼인. 이때 室人은 6살 아래임. |
8월 청일전쟁 발발, 갑오경장 개시 |
1895 | 27 | 첫 아들 의직(義直) 출생함. |
10월 을미사변 발생 |
1896 | 28 | 7월 독립협회에 가담, 간사원이 됨. 개화민권의 기수로 구국운동을 전개함. |
2월, 아관파천 11월, 독립문 기공(다음해 준공) |
1897 | 29 |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로 발전하자, 나라의 秕政을 성토 탄핵, 임금께 이권보존 등 상소하며 국민운동 일선에 섬. 독립협회 사건으로 이준·이승만과 함께 투옥됨. |
경인철도기공(1899년 개통) 10월 국호를 大韓으로 함(광무원년) 11월 어용단체 황국협회가 만민공동회를 습격 |
1898 | 30 | 초여름 7개월간의 옥중생활을 마치고 출옥함. 묵암 李鍾一이 경영하는 『국제신문』에 논객으로 사설을 무기명 집필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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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 31 | 이종일(3.1독립선언시 33인의 한 사람)에 사사(師事), 본격적인 민족주의사상을 정립함. |
南阿戰爭 발발 |